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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당신의 이야기

전국퀴어모여라 2019. 6. 13. 09:55

 

다정(광주성소수자성경읽기모임)

당신

 

 

 

후안, 네가 나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것이 너의 잘못일 수 없듯이, 내가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도 나의 잘못이 아니야.”

- 페드로 알모도바르 <욕망의 법칙>

 

 

 

곧 비 냄새가 날 것 같은 축축한 공기, 난 비는 좋아하지만 비오는 날이 힘들다. 딸기를 좋아하는데 딸기 알레르기 때문에 먹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비를 좋아하는데 비가 힘들다는 건 별로 대수롭지도 않다. 여느 때처럼 나는 모임에 지각을 했고, 도착하니 형형색색의 머리카락들이 날 반겼다(그 중 내 머리가 가장 말도 안 되는 색이긴 했지만). 몇 번 봐서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모임의 흐름을 깨고 느닷없이 끼어드는 침입자가 되는 순간은 멋쩍으면서도 늘 설렌다. 조금 변태 같지만, 사실 난 많이 변태다.

 

전퀴모퀴어클레이카드(이하 클레이카드)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불쑥, 은근슬쩍 섞여서 참여했다. 여러 번 했지만, 할 때마다 새롭고 재밌다. 약간 보드게임 같아서 정말 신난다. 다른 사람이 뽑은 카드 질문에 마음속으로 내 대답을 해보곤 한다.

 

후기를 한참 지난 후 쓰려다보니 도무지 내가 뽑았던 질문이 기억나지 않는다. 예전에 추석모임에서 클레이카드 할 때 뽑았던 질문은 지금도 기억난다. “향기, 나에게서 어떤 향기가 날까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가 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에게 물들 테니까.

 

퀴어문화축제(이하 퀴퍼) 이야기도 나누었다. 올해는 아직 한 번도 못가서 아쉬웠는데, 모임을 통해서 다른 지역의 퀴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재미있는 일화도 많고, 논쟁거리도 많았다.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이 멀구나 싶으면서도 예전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축제가 열리는 걸 보면 외로운 걸음은 아닐 것이기에 다행스럽기도 하다.

 

아프리카 코사족 속담에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고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외로운 걸음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멀리까지 못 가면 또 어떤가,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더 다양한 지역에서 퀴퍼가 열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역에 살면 수도권에서 열리는 퀴퍼에 참여하는 것이 수고롭기도 하고, 시간과 비용의 문제도 있어서 더 다양한 지역에서 축제가 열리길 바란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예산과 행정 등 쉽지 않은 문제를 안고 가야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타협점도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들었다. 1년마다 하는 것에 매이기보다 가까운 지역끼리 합동으로 진행하는 것(예를 들면 올해는 광주, 내년은 전주)은 어떨까 하는 절충안도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 있었다. 오늘 어땠는지 소감을 나누고, 포스트잇에 적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아마 특별 이벤트(?) 같은데, 전퀴모 5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작업(?)을 했다. 두 명씩 한 조가 되어 하얀 도화지에 색을 채워 넣었다. 우리의 형형색색 머리카락만큼이나 다양한 작품이 나왔다. 하얀색을 어지럽히는 것은 정말 유쾌한 작업이다. 빈 종이를 두려워했던 어떤 작가가 생각난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화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빈 종이를 채우는 것이 즐겁다(과제를 할 때 뜨는 하얀 화면은 끔찍하지만).

다정님이 다른 분과 그려주신 귀여운 글귀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렸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친구가 보내줬던 니체의 시가 생각났다. “언제가 많은 것을 일러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속에 말없이 쌓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 내리는 이 비도 누군가가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면서 쌓은 삶의 조각들일까? 당신이 구름이든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살아줘서 고맙고, 살아 내줘서 고맙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다정님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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