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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퀴모> 광주 기행! 6첩반상

전국퀴어모여라 2014. 6. 4. 11:35

6첩반상



광주역 옆 김밥집에만 가도, 6첩 반상이 나온다고, 광주는, 아무데나 들어가서 밥을 먹어도 서울의 맛집보다 더 맛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광주의 명물은 먹을 것, 이었다. 마치, 무진의 명물이 안개인 것처럼 그 외에는 자랑할 것도, 있는 것도 없었다. 재밌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더불어 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불행이 광주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어떤 불행들은 광주를 비껴갔다. 발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덕분에 광주는 조용하고 집값이 쌀 수 있었다.


나는 광주 시민이었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광주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광주는 아름다웠다. 봄이 되면 어딜 걸어가든지, 벚꽃이 아플 정도로 피어 있었고, 조선시대에 하사받았다는 매화나무에서는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은은한 향이 났다. 매화꽃이 지고 나면, 철쭉이 피었고, 철쭉이 지고 나면 이팝꽃이 피었고, 백일홍이 피었고, 백일홍이 지고 나면, 단풍이 물들었다. 단풍은 꽃처럼 아름다웠다. 언제든 잔디밭에서 자고 있으면 농대에서 키우는 양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 고개를 들면 주위를 둘러싼 산이 보였고, 산은 늘 푸르고, 예쁜 꽃들이 피었다.


하지만 너무 지루해서 차라리 전쟁이 났으면 싶었다. 너무 지루했다.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단 한번도 두근거린 적도 없었다.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건 역사철학 수업을 듣는 심방과 여학생이었지만, 그게 두근거린다는 건 지도 모른 채, 한 학기를 마치고 말았다. 그 뒤로 여학생을 본 적도 없었고, 마주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이름도 생각 안나는 여학생을 생각했다. 절대 그 여학생이 위노나 라이더와 키이나 나이틀리를 절반씩 섞어놓은 것처럼 생긴데다가, 키가 나만큼이나 훌쩍 크고, 성격이 털털해서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광주에서 내가 본 사랑은 이성애가 전부였다. 아무도 내가 그 여학생을 보고, 두근거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혹은 사학과 수업을 같이 듣는 철학과 언니의 집에 갔을 때, 왜 쭈뼛거리며 온몸이 저릿저릿했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머리가 짧고, 보이시한 문예창작학과 언니와 함께 서점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남자친구와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는 시간보다 더 좋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가 두근거리고, 시간을 더 보내고 싶고, 왠지 모르지만, 밤늦게 문자를 보내고 싶은 그녀들은 모두 남자친구를 만났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서울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무런 대책없이 올라와버렸다.


그리고 서울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뒤로 세상은 너무 쉽게 변했다. 내가 의심하는 모든 것들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내가 가졌던 두근거림들과 망설임들과, 고등학교 때 이유없이 친구들에게 화를 내면서 나와만 친하라고 떼를 썼는지 모든 것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 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되었다.


그뒤로 광주는 가지 않았다. 그곳은 이성애자들만 득실거렸다. 답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곳은 싫었다.


하지만 그 지루해 미칠 것 같은 광주에도 우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과 조금은 달랐다. 홍대와 종로가, 이태원이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모여서 주말을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반 사이트와 현재 만나고 있는 나의 연인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들은 모두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러 갔다. 남자 둘과 여자 넷이 함께 갔다. 실은<전국 퀴어 모여라> (전퀴모) 의 일원인 소련 게이님과 나, 온갖 디자인을 혼자서 도맡아하는 이벼님과 셋이서 단촐하게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일원 중 둘이 연애를 하다보니, 그들의 애인들도 함께 가고, 회의는 참석하지 않지만, 단체 카톡방에 들어와서 수렴청정을 해주시는 김모리씨도 함께 하다보니 여섯 명이 되었다. 여행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았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떡갈비! 고기를 먹지 못하여, 옆에서 비빔밥만 먹어서 맛은 모르지만 다들 폭풍흡입을 하는 걸로 봐서는 맛있었던 것 같았다.


광주에서 동인련 웹진팀의 이주사와 광주 터줏대감(이라 쓰고 마님이라 읽는다) 태권브이님도 함께 만났다. 이주사와 태권브이님을 만나기 전, 전퀴모는 광주학생운동 기념 공원과 광주민주화항쟁의 투쟁의 현장이었던 전남()도청을 둘러보았다.


광주학생운동기념공원 끼스럽게 찍은 사진도 있으나, 그건 우리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한다. 


내가 그곳에서 유의깊게 본 것은, '티나는' 사람이 과연 몇인가였다. 어차피 도청이든, 광주학생 뭐시기든, 어릴때부터 질리도록 가봐서 별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내가 중요한 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서, 내가 이성애자로 살던 도시에, 내가 모르던 우리들이 몇이나 있는 것 뿐이었다. 내가 발견 한 것은, 하루 종일 딱 두 명이었다. 내 게이다가 녹슬었나 싶었지만, 그럴리는 없었다.


광주극장에서 발견한 귀여운 글귀!


그리고 우리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 전남대학교 앞에서 태권브이님과 이주사를 영접했다.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주사를 배웅하고, 여자 넷은 이반바로 향했다. 남자들은 갈 수 없다고 했다. 전퀴모의 광주사는 일원인, 강한새님이 이반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다음 지도에서 알려준 곳으로 향했는데, 지도가 우리를 속였다. 그곳에는 같은 이름의 옷집이 있었다.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다음 지도에 대해서 더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겠다. 택시를 타고, 이반바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겨우겨우 도착했지만,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무것도 없었다. 라이브 카페만 즐비했다. 술취한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면서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눈씻고 찾아봐도 여자는 우리밖에 없었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심지어 비탈길을) 두리번 거리면서 올라갔다. 겨우겨우 찾은 이반 바 앞에는 여성 동호회 전용 클럽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글귀가 써 있었다. 그걸 왜 써놨는지,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8시 반이었는데,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진짜, 우리 밖에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두 명이 왔는데, 두 분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열시 반 쯤 집에 가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몇명이 더 와 있었는데, 모두 사장님과 친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바에 있는 모든 손님과 사장님이 다 아는 사이였다. 그런 식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계산을 하는 동안, 사장님이 나와 내 애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분 분위기가 너무 비슷해요. 커플 같아요.” 그 말에 우리는 좀 어리둥절했다. 커플도 아니고, '같아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득, 애인의 광주사는 친구들이, 부치를 좋아하는 부치인 나를 보고, 처음 게이 친구를 갖게된 이성애자처럼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게 생각났다. 나같은 종류의 인간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둘다 보이시한 애인과 나를 연인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 긴 언니들이 나와 애인을 새침한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고 간 것도, 그것과 같은 이치인 것 같았다. 사장님께 우리는 커플이라고 말하려다가 가치관의 혼란을 줄 것 같아서 그냥 나왔다. 우리가 나올 때까지, 딱 두 테이블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간 곳은 밤 열 한시가 넘어야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라고 했다.


이제, 게이바 탐방에 나선 웨스트 할리우드 출신 김모리씨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전퀴모에서 광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광주 토박이이신 태권브이님이 달려와 주셨어요. 태권브이님과 광주의 명물 깻잎치킨을 먹었어요. 저녁을 먹고 나서는 레즈비언들은 L바로, 게이들은 태권브이님과 함께 게이바로 향했어요. 술을 먹기엔 시간이 좀 남아서 태권브이님 차를 타고 소련게이님과 저는 광주 드라이브를 했답니다. 광주가 한 눈에 보이는 무등산 전망대에서 야경도 보고 창문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광주 시가지를 달리기도 했어요. 즐거웠다능.


드라이브를 하면서 태권브이님이 광주 게이바의 역사를 들려주셨어요. 태권브이님은 광주 게이바보다 서울에 있는 게이바를 먼저 가보셨다고 해요. 서울 게이바에서 추천을 받아 군복무 시절 휴가를 나와서 광주에 거의 처음 생긴 게이 술집에 가셨는데 서울에 있는 게이바의 분위기와 달리 나이 많은 언니들이 막 만지고 그래서 무서워서 도망 나오셨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본격적으로 ‘게이바’가 생기기 전에 게이들이 물어물어 찾아와 모이는 커뮤니티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 이후로 지금과 같은 본격적인 게이 술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라고


시간이 좀 되어 본격적으로 게이바로 향했습니다. 게이 골목을 훤히 꿰고 계신 태권브이님을 따라 처음 들어간 곳은 생긴지 얼마 안 된 소주바였어요. 인테리어가 정말 깔끔했다능. 태권브이님이 사장님과 오래 아시는 분이었는지 환영해주셨어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별로 없었지만 대신 일하시는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까 좋은 일 한다고 해 주셨어요. 김조광수 감독님 결혼식때 어땠냐고 여쭤보니 좋았다고 하셨음


숙소 근처에 있던 세탁소 


다음으로 다른 바에 갔 어요. 그곳에서 태권브이님의 옛남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참 한 사람의 삶이란 모두 한 편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이나믹한 이야기였어요


마지막으로 간 곳은 광주 게이 술집 중 사람이 가장 많다는 바였어요. 가라오케처럼 되어있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젊고 예쁜 게이들이 많았어요. 끼부리면서 노래 부르는건 서울이나 광주나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소련게이님과 저는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를 만큼의 기갈은 없어서 예쁜 게이들 구경하며 술이나 먹었어요. 태권브이님이 빨리 남자 하나 골라보라며 채근하셨지만 저는 조신한 게이여서 그러지 못했다능.


그리고 시간이 너무 늦어서 모텔에 들어가 소련게이님과 함께 잠들었어요. 너무 늦어서 좋은 모텔은 다 문 닫아버린 바람에 안 좋은 모텔로 들어갔더니 그 퀄리티에 충격을 받았다능.




아직 절반밖에 나오지 않은 음식들 태권브이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태권브이님께서 대접해주신 반찬이 두층으로 나오는 전라도 한정식을 배불리(라고 쓰고 미친듯이라고 읽는다) 먹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부랴부랴 탔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